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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으면서 한번 생각해보자. 스스로 이 상황에 처하면 어떤 기분이 들 것 같은가? 답답하다 못해 환장할 지경일 것이다. 실제로 저런 상황에 처하면 외교공관의 도움을 받고 싶은 기분이 간절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라면 현지 외교공관에서 나서도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없다. 애초에 치안은 그 나라의 고유 권한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경우 현지 공관이 주재국의 치안에 함부로 간섭하는 일은 심각한 외교적 결례로 인식된다. 심지어 한 미국 청년이 싱가포르에서 체포되어 태형을 선고받자, 미국 대통령이 싱가포르에 압력을 행사한 사례에서조차 싱가포르 정부는 쿨하게 형을 집행했다. 주권이 강하게 존중되는 오늘날 국제사회에선 이런 상식이 당연한 것이다.
그렇다면 주권이 좀 덜 존중되던 시대는 어떨까? 이를테면 제국주의의 전성기인 18세기 후반쯤 말이다. 이 시대 선진국이라면 저 비문명국의 불합리한 법체계에 자국민을 맡기지 못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당시 구미열강은 아시아 국가들과의 조약에서 거의 무조건 치외법권을 제시했다. 그리고 이 조약의 이유는, 문명법제를 시행하지 않는 국가의 공권력에 자국 시민들을 맡길 수 없다는 사상이 그 배경이었다. 부패한 현지 관원들에게, 그리고 법적 권리와 정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비문명인들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사상에는 일종의 우월주의 사상의 향이 짙게 배여있다. 실제로 아편전쟁 당시 영국정부의 최초 명분은 영국 상인들의 재산을 함부로 침탈한 국가에 대한 응징이었다. 대영제국의 시민이 저들에게 재산권을 침탈당했는데 국가는 무엇을 하느냐는 강력한 요청이 배경에 깔렸던 것이다. 물론 영국 의회도 치안권을 청나라 정부가 청나라 영토 내에서 행사했음을 신경쓰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 이유가 아편 무역을 막자는 명분을 깔고있다면 더욱 정당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결국 영국 의회는 아슬아슬한 찬성률로 전쟁을 결의하였다.
그럼에도 당시 청과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애초에 근대 논리를 이해하지도 못했음이 사실이다. 그들은 다만 문명국의 법제를 집행한다고 주장하는 서구 열강의 주장을 단순한 침략으로 이해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건 그렇게까지 잘못된 시각이라 보기도 어렵긴 했다). 서세동점의 상황에서 이런 반응은 거의 모든 비서구국가들이 지녔던 인식이었다.
물론 예외가 없지는 않았다. 일본제국은 구미열강과 체결한 불평들 조약을 철저하게 지켰다. 이를 두고 단순히 일본이 서구 세력에 굴복한 것만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이런 철저한 이행은 당시 일본이 근대법 체계를 매우 높은 수준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당시 청과 조선은 일본에 비하면 근대법적 체계를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좀 극단적으로 말해, 조선과 청은 맺어진 조약의 의미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었고 그걸 수행할 체계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유럽인들은 청나라 중앙정부와 조약을 맺었음에도 지방 정부가 이를 이행하지 않는 일을 조약 위반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메이지 이후 일본 제국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일본이 불평등조약을 지킨 것은 오히려 일본이 서구화를 성공적으로 이루고 있다는 증거였던 것이다.
예를 들어 일본의 경제 침탈 사례로 알려진 방곡령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전 한국의 국사교과서나 근현대사교과서에서는 방곡령에 대해 마치 일본의 쌀 수탈이 배경인 뉘앙스로 서술하였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방곡령이 내려질 당시 일본으로 쌀이 다량 흘러간 것은 사실이다. 당시 방곡령의 배경은 일본 내지의 쌀 부족 현상으로 인해 일본 상인들이 조선 쌀을 대량으로 구매해간 것이 원인이다. 일본인들은 이렇게 매입한 다량의 곡물을 본토로 수송하였다. 그 결과 조선에서는 반대로 쌀 가격 급등현상이 일어났다. 이 해결을 위해 각지의 수령들은 일차적인 사고방식을 선택하였다. 자체적으로 방곡령을 내려 쌀 수출을 통제한 것이다.
문제는 일본인들의 행위가 정당한 상행위를 통한 수출이었지 약탈이나 수탈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물론 민생 안정 차원에서라도 방곡령의 필요성 자체는 일정 합리성이 있었다고 할 것이지만, 당시 일본 상인들이 조선 곡물을 구매한 것은 조일통상장정이라는 명백한 권원을 가지고 한 행위였다. 각지의 수령은 이에 대해 전혀 아무런 고려가 없었던 것이다. 이후 조선 정부와 일본 사이에 재조선국일본인민통상장정이 체결됨에 따라 조선 정부는 쌀 수출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획득하였지만, 이 역시 조문 해석문제를 두고 다툼이 생기는 바람에 제대로 사용될 수 없었다.
이 문제를 두고 당시 일본 제국의 경제적, 군사적 능력이 조선보다 월등했던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일본제국은 매우 강압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요구를 관철시켰다. 그런데 이런 요구 관철이 가능했던 이유는 진짜로 조약이 그렇게 되어있었다는 점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모든 법조문이 그러하듯 조약의 개별 조문도 단순히 읽기만 해서는 내포된 뜻을 파악할 수 없다. 조선은 당시 조약을 체결하면서도 무슨 조약을 체결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는 당시 조선 중앙 정부가 체결한 조약에 대해 지방관들이 이해를 하지 못한 사실을 보여주며, 나아가 중앙정부에 의해 통일된 행정체계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었던 전근대 통치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상술한 사례는 조선이 최초로 체결한 근대적 조약이라는 강화도 조약에서도 해당된다. 물론 당시 일본의 기세가 강력했지만 조선은 당시까지 굳이 불평등 조약에 서명해야 할 만큼의 심각한 피해도 입지 않고 있었다. 이전의 병인양요나 신미양요 사례를 생각하면 더욱 그러했다. 물론 피해 없이도 정책적 고려에 따라 조약을 맺을 수는 있었을 지도 모른다. 또한 양국의 국력차를 고려한다면 조약에 어느정도의 불평등성이 포함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강화도 조약의 수준에 이르지 않는 정도로 수준을 완화할 수는 있었다. 이는 당시 양국 사이에 있었던 회담에서 조선측 대표가 상당히 당당한 태도로 응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당시 조선 정부는 이런 이점을 포기하고, 그 의미를 제대로 생각하지 못한 체 황망히 조약체결에 이르렀을 뿐이었다. 조선 정부는 강화도 조약이 현대인들에게 조선이 체결한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라는 역사적 의의로 기억될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치 못했을 것이다.
이에 비해 일본제국은 훨씬 기민한 태도로 조약에 접근했다. 이미 체결한 불평등조약을 해결하기 위해서 일본은 철저하게 자신들이 문명법제를 따르고 있음을 어필하였다. 서양인이 일본 내에서 범죄를 저지르면 해당 사건은 내각에서 다루어졌으며 조약에 위반되지 않는 방식으로, 내지는 해당 국가와의 외교적 협상으로 처리되었다. 때문에 메이지 이후 일본은 타 서구 열강과의 외교적 마찰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일본제국은 조선을 병합한 뒤에도 법논리를 세밀하게 적용하였다. 이를테면 조선에 일본 내지와 동일한 법제를 적용하느냐의 문제에서 당시 제국 정부는 만약 조선을 단순 식민지로 취급하여 내지와 분할된 법제를 시행할 경우 조선 내에서의 치외법권 문제가 제기될 가능성을 심도있게 검토했다. 이런 사고방식은 철저하게 법조인으로서 다져진 서구 법학자들의 수준에 가까운 것이었다. 동시기 조선(은 이미 망했지만)이나 청조의 실력으로 이런 해법은 아예 불가능했다.
이상의 과정이 이후 일본이 불평등조약을 해결하는데 공언했다. 1905년 러일전쟁을 거쳐 일본이 메이지의 사명을 다 하자, 서구국가들과의 조약개정을 통해 치외법권은 폐지되었다. 그들은 일본이 당당한 근대국가의 일원으로, 문명법제를 시행하는 나라 사이에 위치하게 되었음을 인정하였다. 이 과정에서는 일본의 군사적, 경제적 역량도 물론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 과정은 그 이전 수 십년간의 외교적, 법제적 노력의 결과인 것 또한 사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