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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이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전제할 점이 있다. 정상회담은 본래 담판용이 아니다. 뮌헨 회담같은 특이한 케이스가 없던 것은 아니지만, 사실 그 뮌헨을 포함해서 모든 경우에 정상간의 담판을 통해 군사적 긴장이 해소된 바는 없었다. 이는 근대 이후 국가의 특성상, 설령 국가원수급의 지도자라 해도 그들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국내외 각 정치세력을 조율하고 납득시키는 과정이 있어야 하며, 이걸 넘어간다 쳐도 단순 실무적인 부분만 보아도 그렇다. 워싱턴 군축조약을 포함한 절대다수의 군사적 긴장상태 완화를 위한 조약들은 국가원수에 의해 담판지어지지 않았고 수 백명 이상의 실무진들이 수 백개에서 수 천개에 이르는 조문들을 외교적 수사를 넣어가며 작은 단어 하나 하나를 고치고(여기서 전문 직업 외교관들이 활약한다) 또 각종 부칙을 집어넣어 개별 함선의 배수량과 무기 종류를 규정하고(여기서 전문 직업 군사전문가들이 활약한다) 그 외에 각종 예외조항을 추가로 넣어가며 협상한다.
이런 현실에서 정상들이 하는 일은 몇몇 이슈에 대한 담판이 아니라, 이미 협상이 완료된 조약에 대해 최종적으로 양국을 대표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남녀의 결혼과도 같다. 신랑 신부에 더해 양 가를 납득시키는 과정까지 끝나 이미 결혼에 대한 합의가 적당히 이루어진 상태에서 누가 언제 어디서 프로포즈할 것인가의 문제는 세부적일 뿐, 결혼하는 것이나 비용의 분담 비율과 같은 핵심적인 부분은 이미 상당수 끝나있는 것이다. 프로포즈의 아름다운 단어와 반지는 그저 기념을 위한 상징적인 행위일 뿐이다.
이 전제에서 2019년 하노이 회담을 보자. 김정은은 이 회담을 위해 66시간동안 중국 대륙을 횡단하며 이동했고 이번 협상을 상당히 고대하던 것처럼 말할 뿐 평가절하한 적이 없다. 상식적으로 아무리 김정은 정권이 통상적인 범주가 아니라 하여도, 이렇게까지 분위기를 띄운 이상 협상이 결렬되면 정치적 타격은 뻔한데 확실한 협상이 아니라면 미리 분위기를 가라앉히지 않았을리가 없다. 그렇다면 왜 김정은은 이렇게까지 결렬되면 큰 정치적 타격으로 이어질 회담을 마치 빅딜을 할 것 마냥 띄웠을까? 답은 간단하다. 이 회담이 곧 결혼반지 제작의 단계로, 이미 이전 실무진끼리의 대화가 모두 끝난 이상 이견없이 하하호호 웃으며 '우리 시대의 평화'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노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징조는 아침에 있었다. 2월 27일 저녁 양측 회담 이후인 2월 28일 아침 김정은 위원장의 표정은 매우 굳어있었다. 대사도 상당히 더듬거리는 느낌을 주었다. 이건 상당히 이상한 일인데, 아무리 스피치 능력을 중시하지 않는 국가라고 해도 각국 언론 앞에서 국가원수가 인터뷰를 할것이라면 이미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미리 사전에 대사를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지도자의 체면을 중시하는 북한이라면 더욱 그렇다. 김정은이 나서는 행사에서 북한 정권은 엑스트라 역할을 맡은 배우들까지도 중간에 결원이나 여타 사고가 생길것을 대비해 3차까지 철저히 준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아무리 외국이라지만 인터뷰용 대사를 준비하지 않았을리가 없다. 1분이 중요하다는 김정은의 다급함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까지 황급히 해야 할 협의 사항이라면 사전조율을 해야 할 것 아닌가? 언론에서는 '그동안 비핵화 협상의 우여곡절'같은 말을 운운하며 협상과정이 힘들었기 때문일 것이라 막연히 추측했지만 이는 위의 사정을 보면 상당히 이상하다. 기나긴 협상이 끝나고 고대하던 목적을 성취하게 된 상황에서 굳은 얼굴을 왜 하고 다급함은 왜 보이는가? 김정은의 상황은 간단하다. 27일 저녁에 이미 무언가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여기엔 다음의 시나리오가 진실이거나 최소한 진실에 매우 가까울 것이다. 우선 전술한 바와 같이 김정은을 비롯한 북한측 대표단이 이 결렬의 주도자가 아님은 분명하다(다만 이는 그들이 미국을 상대로 신의있게 협상을 했다는건 아니다). 즉 하노이에서 결렬을 만들어낸건 미국측일 것이다. 좀 더 정확하겐, 두 계열의 미국측 인사들이 이 문제에 개입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존 R. 볼턴(John Robert Bolton) 국가안보보좌관 내지는 마이클 R. 폼페이오(Michael R. Pompeo) 국무장관 계열의 인사들이다. 이들은 애초에 좋은 협상(Good Deal)이 아니라면 차라리 결렬이 낫다고 처음부터 생각했을 것이다. 즉, 회담의 파토는 볼턴(혹은 폼페이오나 다른 누군가)에 의해 '의도된' 것이
된다. 물론 이 경우에도 김정은이 회담 성사가능성을 매우 높게 보고 하노이에 도착했음은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북한 내
언론기관들이 이번 회담 전에 벌인 온갖 설레발을 설명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경우 폼페이오 등이 연출한 전말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폼페이오는(혹은 볼턴은) 북한과 계속해서 협상을 진행해왔으며, 실제 지난 1년 간 양국 사이에서는 계속해서 외교안보라인의 접촉이 있었다. 이미 폼페이오는 공개된 것만 4회 이상 평양으로 향한 바가 있으며, 이는 분명 아주 진지하지 않은 협상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이 협상에서 폼페이오건 볼턴이건 정말로 '좋은 협상(Good Deal)'이 이뤄지는게 아니라면 이룰 생각이 없었을 것이며, 여기서 말하는 미국측의 '좋은 협상'이란 곧 일부 교환식의 협상이 아닌 전면적인 동시 협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그런 방식의 협상에 임할 생각이 없었음은 여러가지 정황증거들이 보여주고 있으며, 따라서 애초에 협상 타결은 이뤄질 수 없었을 것이다. 폼페이오 등은 바로 이 지점에서 매우 효과적인 협상전략을 취했는데, 그건 바로 북한이 원하는 방식(미국측에겐 'Bad Deal')의 협상도 타결이 가능할 것처럼 행동했다는 것이다.
물론 볼턴 등이 정말로 김정은 정권과 신의있는 협상을 기대했기에 협상을 지속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후 사정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음은(즉 김정은 정권의 의도를 모른 것은 아님)은 확실하며 따라서 미국측이 북한으로부터 신의있는 협상을 기대했을 가능성은 배제하는게 옳을 것이다. 즉 그들은 김정은 정권이 핵무기를 정말로 포기할 리 없고 이전에 그러했듯 다시 핵개발에 나설 수 있도록 관련 조치를 취한 상태에서(즉 핵시설이나 핵물질을 숨겨놓은 상태에서) 미국과 국제사회를 상대로 '사기'를 칠 생각일 뿐, 결코 좋은 협상이 이뤄질 수 없을 것임은 여러 차례의 접촉에서 분명히 확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폼페이오 등은 미국의 정보자산을 통해 이미 북한의 의도를 상당수 확인하였을 것이며, 이는 트럼프 대통령의 '실은 당신들이 숨기고 있는 핵시설이 더 있다(혹은 그 시설들이 알려진 것 이상으로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는 언급으로 확인된다(당연히 이것은 폼페이오나 볼턴에게도 알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폼페이오 등은 자신들이 그걸 안다는 사실을 북한에 숨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마치 미국이 순진하게 북한의 의도대로 속아넘어가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협상을 계속 지연시키도록 했을 것이다. 이에 안달이 난 북한 정권은 2018년 신년사 직후 지금까지 약 14개월 동안 놀라울 정도의 참을성을 보여줬을 뿐 아니라, 정말로 핵을 포기할 것처럼 행동하며 이를 국제사회에 보여주기 위해 여러 조치를 취했다. 핵실험장 폐기, 미사일 발사장 해체, 그외에 온갖 김정은의 립서비스가 이어졌다. 이는 북한이 2018년 이후로 계속해서 미국과의 협상을 원하고 특히 국제제재를 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미국이 정말로 북한의 본 의도(핵무기도 포기하지 않고 국제제재도 풀려는)를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여 속여넘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즉 김정은 정권은 순진해보이는 미국인들을 상대로 어떻게든 자국이 원하는 협상을 타결시키게 하기 위해(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핵시설과 핵물질을 따로 숨겨놓고 '사기'를 치기 위해) 이런 기만책을 지속했을 것이고, 볼턴 등은 북한이 '사기'를 치고 있음을 정보당국으로부터의 첩보를 공유받아서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나
모른 척 하면서 계속해서 북한과 협상을 지속했을 것이다. 때문에 북한은 미국이 자신들의 숨겨진 비밀 핵시설을 아직 잘 모른다고 오판하고 어쩌면 그 미국을 상대로 사기를 칠 수 있을 것이라고 계속하여 착각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폼페이오 등은 계속해서 능숙하게 북한을 상대로 밀고 당기기를 반복하며, 북한이 협상 과정 중에 넌더리를 내려 하면 미국이 양보하고, 반대로 협상이 타결될 거
같으면 다시 요구조건을 강화하는 식으로 외교적 지연전을 벌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폼페이오 등은 애초부터 북한을 상대로 강경하게 나가지 않고. 이런 지연전을 펼친 것일까? 여기에는 다음의 이유가 있다. 우선 이 지연전의 첫 번째 장점은 김정은 정권의
기만성을 확실하게 드러내고 국제여론을 자기 편으로 돌릴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협상의 최종 장면에 감춰진 핵시설을 폭로함으로서
김정은 정권이 보여준 평화공세가 거짓이라는 사실을 쉽게 모두에게 인지시킬 수 있다. 처음 김정은 정권은 이 '사기'가 성공할지
의심했을 수도 있을 것이나, 미국인들이 자신들이 숨긴 다른 핵시설에 대해 아무 언급도 없이 계속 협상을 진행한 이상 정말로 미국을
속여넘길 가능성이 높다고 오판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오판으로 인해 김정은 정권은 비핵화를 정말 할 것처럼 행동할 수 밖에
없었다. 김정은 정권은 아직 아무런 협상의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음에도 수많은 언론 플레이를 보여줬고 이는 그들이 성공적인 사기를
위해 크게 노력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실제로는 숨긴 핵시설이 있다는 사실을 최종 시점에 알림으로서 미국은 북한 정권의
언론플레이는 말 그대로 거짓임을 확실하게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두 번째 장점은 이를 통해 미국이 나름 북한을 상대로 최선을 다해 협상에 임하려고는 했음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김정은 정권의 기만적 행동을 확인한 즉시 협상을 중단하였다면 미국이 북한에 지나치게 비타협적으로 대한다는 여론이 형성될 수 있고, 대북유화책을 펼치는 문재인 정권과의 엇박자도 더욱 심화되었을 수 있다. 더군다나 북한이 다른 수단 등으로 압력을 행사하여 국제여론을 움직이려 할 가능성도 고려해야 했을 것인데, 즉 미국이 과할 정도로 비타협적으로 나오므로 북한은 어쩔 수 없이 자위를 위해 핵을 개발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며 더 나아가 미사일 발사나 여타 수단을 동원하며 남한 측의 여론을 자극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세 번째 장점은, 지연이 계속되는 동안 제재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북한은 계속 제재를 받고 있어왔다. 이는 김정은 정권의 통치자금을 계속해서 말려왔을 것이다. 만약 협상이 불가능하다는게 분명했다면 아직 비자금의 충분한 여유가 있는 상태에서 다른 수를 미리 고려할 수 있었겠지만, 미국이 사기에 걸려들 것처럼 보이는 이상 그로부터 예상되는 엄청난 보상 때문에 북한은 다른 모든 방법을 포기하고 협상 타결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시간이 더 지나면 지날수록 미국에게 더 유리하게 작동하고 김정은에게 더 불리하게 작동한다. 미국과 달리 김정은의 통치자금은 제한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시점에서 협상이 어그러진 이상 통치자금이 이미 많이 말라있는 김정은 정권은 이전보다 훨씬 긴박감에 시달릴 것이다.
네 번째 장점은 김정은의 영도력 자체에 회의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김정은 정권은 국제제재에 맞서 북한인들에게 인내를 강요해왔지만, 제재가 지속될수록 북한인들은 대체 무엇을 위해 자신들이 그런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지 의문을 품을 수 밖에 없다. 김정은 정권이 할 수 있는건 불평불만분자를 숙청하며 동시에 '곧 대장 동지의 뛰어난 외교력으로 제재를 풀어낼 것이다'라고 홍보하여 달래는 정도였을 것이며, 실제로 하노이 회담 직전까지 북한의 모든 매체가 전면적으로 나서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시작되었음을 자랑스러이 떠벌린 것은 어떻게 해서든 북한인들에게 곧 제재가 끝날 것임을 (그러니까 조금만 더 견디면 된다는 것을) 알려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기대한 결과가 실패로 돌아간 이상 북한인들은 김정은 정권이 다른 대안이 없을 가능성을 깊이 고려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의 시나리오에서는 의문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폼페이오 등은 그렇다 치고, 그렇다면 트럼프 대통령의 역할은 무엇이었냐는 것이다. 물론 트럼프 대통령이 No Deal을 보여줌으로서 이전 싱가포르 회담에서의 실수를 만회하고 미국 정계에서의 신뢰감을 구축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로 인한 정치적 이익이 그렇게까지 크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트럼프는 폼페이오나 볼턴의 견해를 일정 부분 공유받았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협상이 정말 진행될 것처럼 진행하고 김정은을 상대로 수 많은 립서비스를 진행하기에는 그 동안의 정치적 위기가 작다고 보기도 역시 어렵다.
여기에는 다음의 설명이 합당할 것이다. 우선 트럼프가 아무것도 모르고 볼턴이나 폼페이오에게 (혹은 김정은에게) 끌려다닌 게 아님은 분명하다. 트럼프가 추후 발표한 내용에서 이미 유추할 수 있듯, 미국의 정보기관은 대통령에게 자신들이 수집한 정보들을 보고했다. 그리고 거기엔 분명 숨겨진 핵무기나 핵시설들(북한이 스스로 존재를 인정한 적이 없는)의 목록이 있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소문은 이미 여러곳에 돌았으며, 트럼프라도 해서 이를 몰랐을 리는 없다. 그러나 트럼프는 동아시아의 복잡한 정치적 문제를 해소하고 싶은 생각이 아예 없지는 않았을 것이며, 아마 볼턴이나 폼페이오보다는 좀 더 긍정적으로 협상에 임해볼 생각이 있었을 것이라 보인다. 즉 정말로 정상끼리 한번 만나서 속을 터놓고 대화 한번 해보는것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을거라는 것이다.
이상의 근거는 트럼프가 본래 정치가라기보다는 기업가로서 활동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사업가로서 협상에 나설 때 기선을 제압하고 여러 차례의 미팅을 거치면서 상대를 압박함으로 원하는 결론을 얻는 데 상당한 수완을 발휘한 사람이다. 그리고 적어도 양측 사업가들 사이에 협상을 위해서는 자신이 아는 정보를 숨기는 것은 적합한 일이다. 이러한 부분에서 그의 협상가적 능력에 의문을 품을 필요는 없다(성공적인 기업가였던건 분명한 사실이기도 하지만, 애초에 여기서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다). 이는 막후 협상 위주로 들어가는 정치 회담과는 다른 방식이지만, 본디 트럼프는 정치계에서는 다소 아웃사이더였음을 고려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며, 아마 현재 미국 국내정치에서의 트럼프 위치가 불안정하다는 것이 어떻게든 트럼프에게 '도박수'를 두어야 할 만큼
심각한 압박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즉 이 하노이의 정상회담을 세기의 회담으로 만들고 성과를 냄으로서 난국을 돌파할 수 있다면, 한번 해볼 만하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북미정상회담에서 이례적일 정도로 양측의 미팅이 많이 잡힌 이유는, 트럼프 대통령이 그 미팅을 정말 실무 협상을 위한 시간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보면 쉽다. 관리형이 아닌, 돌진형 사업가로서 강한 협상력을 선호하는 트럼프의 기질이 이 부분에서 발휘되었다고 보아도 무리는 없다. 즉 그는 자신이 평소에 해왔듯 실제로 물건을 보고 매매거래를 시도하며 직접 거래 상대방에게 연락하여 발품을 팔고 대화를 걸어보려 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트럼프가 막무가내적인 인간이라는 것이 아니다. 초기의 기선제압 등과는 별개로 어쨌건 좋은 협상을 위해서는 이성적 판단이 뒷받침되어야 하며, 실제로 트럼프는 이번 회담에서도 상당히 차분하게 대화에 임했음이 드러나고 있다. 그는 이 로켓맨(Rocket Man)을 상대로 정말로 한번 대화를 해볼 생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김정은에게 미국이 가진 정보를 공개하고, 이를 협상 테이블에 올릴 생각이 있는지를 타진해보았을 것이다. 애초에 그럴 의사가 없다면 미국측에서는 더 이상 협상을 진행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 대상은 종래 (미국과 북한을 제외한) 각국 정보기관에 알려지지 않은 시설일지도 모른다. 이건 사업협상의 시작이라면 딱히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사업의 책임자가 아닌 국가의 책임자로서 김정은은 그런 식의 협상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매우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김정은이 1분이라도 시간이 급하다고 말한건 아마 이 과정에서 발생한 일로, 트럼프와 정말로 대화를 해야 할 상황에 몰리면서 나온 발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폼페이오와 볼턴은 트럼프의 이런 생각에 대해 굳이 반대하지는 않았을 것인데, 만약 정말로 둘 사이의 대화를 통해 Good Deal이 성사되면 좋은 것이고, 아니더라도 No Deal로 돌아오면 그만이기 때문이다(트럼프도 이 부분에서 그들과 공감대를 형성했을 것이다). 이후 실제 회담장에서 볼턴 등은 북한의 기만성에 대해 지적하였고, 이에 북한 측이 대응하는 과정에서 트럼프는 김정은 정권이 제대로 거래에 나설 생각이 없음을 확인하였을 것이다. 28일 아침의 짧은 단독회담과 확대회담은 약간의 희망을 걸어보려는 행동이었지만, 어쨌건 양 측의 실무진 모두 새로 공개된 정보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협상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다. 트럼프는 거래 성사가 불가능함이 분명해진 시점에 더 이상 진행해봐야 소용없을 것임을 깨닫고 이후의 일정을 취소한 채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다음을 유추할 수 있다. 우선 2018년 북한의 풍계리 핵실험장 패쇄는 핵개발 포기를 뜻하는게 아니라, 이미 핵개발용 시뮬레이터가 완성되었음을 보여준다. 필자는 2018년 초 북한의 신년사에서 이미 이 가능성을 고려했었지만 그 때는 확률이 높다고 보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후
핵실험장의 패쇄는 시뮬레이터의 완성 가능성을 매우 높였고, 궁극적으로 이번 과정에서 드러난 정보를 통해 확실해졌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과거 엄청난 양의 핵실험을 한 미소 양국은 더 이상 핵실험을 하지 않는데, 왜냐면 데이터가 충분히 모여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돌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핵을 제대로 개발하고자 하는 국가들이 핵실험을 굳이 하는 이유는 바로 이 시뮬레이터 제작을 위해서이며, 시뮬레이터만 완성된다면 굳이 국제사회를 극도로 자극하며 비밀리 진행도 어려운 핵실험을 더 이상 할 이유가 없다.
북한은 아직 데이터가 없기 때문에 핵실험을 진행할 수 밖에 없었고, 모든 데이터가 모인 것은 6번째이자 최후의 핵실험이 완료된 2017년 9월일 것이며, 시뮬레이터가 완성되었다는 보고서가 김정은의 책상에 올라간 것이 17년 하반기의 어느 시점일 것이다. 그 시점에서 북한은 자신들에게 더 이상 필요없는 풍계리 핵실험장을 세계 각국의 기자들을 불러가며 퍼포먼스와 함께 폭발시킨 것이다. 협상 테이블에 올릴 필요도 없이 퍼포먼스용으로 터뜨릴 만큼 무가치하다고 내부적으로 판단한 것이 아닌 이상, 북한 정권이 이렇게 행동할 리가 없다. 즉 김정은이 핵실험장은 폭파한 반면 핵시설 및 핵물질을 숨긴 이유는, 핵무기 제작에 핵실험은 더 이상 필요없지만 핵물질은 아직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함으로 명쾌하게 설명된다.
이는 북한이 2018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갑자기 유화모드로 돌아섰음에서 추정해낼 수 있다. 더 이상 핵실험을 하지 않아도 핵개발에 문제가 없기 때문에 이 시점부터 유화적으로 나서면 핵개발을 중단하지 않고서도 중단한 것 마냥 국제사회를 속이기 쉽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에서 문재인 정부로의 변화는 북한의 태도변화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대북유화책을 주장한 문재인 정부가 등장한건 2017년 5월인데 6차 핵실험은 2017년 9월이라는 점은 문재인 정부의 유화책이 북한의 핵개발 의욕을 꺾는데 전혀 관련이 없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낸다(박근혜 정부가 조기 붕괴한 덕에 이를 쉽게 유추할 수 있게 되었다). 2018년 1월 1일 이전과 이후 김정은 정권 태도의 차이는 외부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내부 환경의 변화로 촉발되었다고 보아야 하며 그 내부변화는 곧 시뮬레이터의 완성이라고 볼 수 있다. 북한이 정말 핵무기를 포기할 것이라면 영변이건 다른 모든 핵시설이건 핵무기건 왜 폐기하지 못하겠는가? 미국과 남한의 부가 북한에게
부족할 리가 없다. 김정은은 부를 얼마나 받건, 그걸 지킬 무기가 없다면 소용없으며 따라서 얼마를 제시받건 거기에 핵무장이 없다면
무용하다고 생각한다.
김정은의 의도는 이러했을 것이다. 일단 전면적으로 제재를 풀고 다시 정권의 비자금을 형성한다. 한동안은 '우리 시대의 평화'를 찬양하며 비둘기파의 모습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후 비자금을 충분히 모아 핵무기를 대량생산할 만큼의 여유가 생기고 나면 평화에 매달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이런 정황이 국제사회에 알려졌을 때는 이미 수 십에서 수 백기의 핵무기를 보유하여 사실상 저지할 수 없는 핵보유국으로 등극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 시점에서 다시 제재를 논하여봐야 소용 없으며, 그 동안 다시 축적한 비자금은 김정은 정권이 제재를 견딜 수 있는 힘을 부여했을 것이다. 어차피 저 시점에서는 남한과 미국을 포함한 각국이 핵무기를 가진 북한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만약 이번에 핵시설을 숨기고 제재를 푸는데 성공했다면 그 의도대로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앞으로의 전망은 불확실하다. 그러나 김정은 정권이 강하게 나가기에는 어려울 것이다. 왜냐면 김정은 정권은 현재 가진 패를 다 까놓은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돌아가면서 미사일을 다시 쏘고 도발에 나서는 것을 고려했을 것이지만 실제로는 강한 도발을 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면 이 행동은 협상 가능성을 한동안 무위로 돌리고 무력시위에 나서는 것인데 이 방식으로 미국이 흔들릴 가능성이 거의 없음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김정은 정권이 정말 이 수단으로 미국을 무너뜨리려 한다면 ICBM에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어야 할 것이지만 이미 해당 기술이 확보된 상태라고 보긴 어려우며, 현 시점에서 새로이 기술연구에 나서기엔 가진 비자금이 크게 부족해졌고 국제제재의 압박으로 인해 쉽지도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렇게 처음부터 시작하기에는 김정은이 이번 협상에 건 판돈이 너무 많다(그리고 볼턴이 김정은을 상대로 그렇게 많은 판돈을 걸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쉽게 핵을 포기하고 협상에 나서기엔 또 김정은 정권의 속성상 쉽지 않다. 아마 양국간 대화는 약 반년 정도 소강 상태일 것인데, 왜냐면 미국은 현 시점에서 굳이 먼저 나서서 북한을 상대로 협상에 나설 만큼 (적어도 Bad Deal을 할 만큼) 급한 일이 없고 반대로 북한 입장에서는 압박을 당하고 있다곤 하여도 현재 가진 카드 중 버리고 싶은 카드가 없기 때문에 (제재완화와 핵무기 모두 가지고 싶기에) 역시 쉽게 협상에 나서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마 북한 정권의 다음 행보는 미국이 아닌 타국을 향할 것이며, 구체적으로는 아마 중국과 남한, 일본, 러시아 등이 그 대상이 될 것이다. 아마 김정은은 중국을 상대로는 순망치한의 키워드와 함께 자국 자원에 대한 이권을 보다 많이 중국에 넘겨주는 방식을 택할 것이고, 일본을 상대로는 이전 납북 일본인 문제를 거론하며 이를 해결할 가능성을 아베 신조 일본 총리에게 제시할 것이다. 남한을 상대로는 평화공세와 함께 민족적 동질감 등을 거론하고 함께 한반도 평화체제를 만들어나가자는 등의 떡밥을 던지며 경제개발의 비전을 눈앞에 흔들 것이다. 러시아를 상대로는 지금도 행하는 노동자 수출을 좀 더 전면적으로 확대하고 싶을 것이며, 푸틴은 UN의 제재를 최대한 회피하면서 이를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미국은 이 국가들을 상대로 북한 정권과의 거래를 어떠한 방식으로선 제한하려 할 것이다.
※ 재강조 : 이 글의 저작권은 글쓴이인 블로거에게 속하며 복제, 배포, 개작을 포함한 모든 권리의 타인 사용을 불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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