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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의 중심에서 학습 중심으로
① 기존 부담경감론의 문제
학습은 두 글자, 학學과 습習으로 이루어졌다. 학學은 두 손으로 지식을 얻는 모습을 나타내고, 습習은 날개를 퍼덕이며 연습하는 모습으로부터 나왔다. 배움이라 함은 이 앞과 뒤의 과정을 모두 거치는 것이다. 가장 단순한 산수부터, 미적분이나 이산수학과 같은 고도화된 분야까지도, 외국어건 아니면 다른 어떤 분야건, 무언가를 배운다 함은 그냥 남이 쓰거나 만든 것을 읽거나 보기만 하는 과정에 그쳐서는 체화할 수 없다. 새는 유전적 정보에도 불구하고 날기 위하여 기나긴 연습을 거쳐야 한다. 그 과정에서 낙오하여 날지 못하고 죽는 경우도 드물지만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언어는 자연스러운 생물학적 특성임에도 이를 반복하고 숙달하여야만 제대로 구사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무의식적으로 배움을 다시 풀어낼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을 때야말로 진정한 학습이라 칭할 수 있는 것이다.
언어의 발달과정으로 예를 든다면, 영어권 학생을 기준으로 할 때 6-7세의 어린이는 2만여개의 단어를 알 수 있게 되지만 이를 능숙하게 쓰지(write)는 못한다. 또한 고등학교 과정을 거쳐 6-8만여개의 단어를 알게 되면 대부분 단어를 읽고 쓸 수도 있게 되지만, 한편으로 그 단어들은 다시 인지 단어(recognizable words)와 활용 단어(command of words)로 구분된다. 전자의 단어는 다만 보거나 들으면 뜻을 알 수는 있는 수준이고, 후자의 단어는 자유롭게 구사하고 적절하게 배치할 수 있는 수준을 말한다. 비 모국어 화자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경우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않아도 인지 단어의 양을 키우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이를 활용하여 수준높은 문장을 구사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려면 더욱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고 그런 노력이란 결국 반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요컨데, 창의적인 문장의 구사는 언어를 덜 앎으로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앎으로서 가능하다.
스티븐 핑커는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서 언급하기를 인간의 뇌란 본래 문명사회에서 기원하지 않았으며 원시시대에 더 적응되어있는 바, 결코 스스로 학문적이거나 이성적, 논리적인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핑커에 따르면 배움이란 것은 뇌를 강제로 재편하는 과정이며 인위적인 과정이지, 전혀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다. 마이클 셔머 또한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 라는 저서에서 인간의 뇌는 원시적인 상태에서는 마땅히 논리적이지 않을 수 밖에 없음을 강조하며 그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주장한 바 있다.
결국 어떻게 포장하여도 학습량을 줄인다는 것은 학력저하를 의미하지 않을 수 없다. 차라리 정책의 사유로 인간의 능력이나 재능에 대한 차등을 든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나 그것이 아니라면 이런 정책들은 단순한 인기 영합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배움의 과정이 고통스럽다고 말하며, 학교를 즐거움과 추억을 위한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그 낭만성에도 불구하고 본래의 목적을 잃은 행위에 불과하다. 배움은 원래 고통스러운 것이며, 고통을 경감시키려는 정책이건 이를 무시하고 수용을 강제하는 정책이건 배움 자체를 포기하게 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것이다.
근래의 학습부담을 덜기 위한 정책들은 이런 논점들을 무시하고 있다. 학생들의 다수가 공부로 인해 불행해한다는 사실은 그렇게 보면 당연한 것이다. 물론 고통의 와중에도 지적인 기쁨을 느낄 수 있지만, 적어도 이걸 기대하고 교육을 진행해서는 안된다. 재삼 이야기하거니와 공부는 원래 고통스러운 과정이고 이를 부인해서는 안된다. 고통이 있다고 발전 중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고통이 없으면 발전 중이지 않은 것이다.
② 학습과정의 통제
그러나 현행 제도 하에서는 학습보다는 강의를 중심으로 교육이 진행된다. 즉 교사의 역할은 앞에서 지식을 말하는 것에 있지, 그것을 학생들의 머리에 집어넣는것에 있지 않다. 예를 들어보자. 현행 교육과정 하에서 초등학교 수학 교육에는 두 가지 교과서가 사용된다. 하나는 수학책이고 다른 하나는 수학익힘책이다. 전자가 학學을 담당한다면 수학익힘책은 습習을 담당한다. 즉 교사는 수학책을 기준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수학익힘책은 집에가서 숙제하거나 복습을 하는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복습을 학생의 자율에 맡기면 아이들은 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거나, 수행하지 못한다. 수행하지 않는 이유는 복습이 매우 지루하고 힘든 과정이기 때문이다. 교육자(부모나 교사)의 적절한 통제가 없다면 아이들은 복습을 하지 않는다. 수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한 번의 강의로 배움이 완료되지도 않고 따라서 연습을 위한 준비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문제를 왜 못 푸는지, 혹은 풀고 나서 왜 틀렸는지에 대해 적절한 지도를 받아야 한다.
이런 현실에서 어릴 때부터 수업의 진도를 적절히 따라가는 아이들은 결국 부유하거나 여유있거나 배움이 충실한 부모 밑에서 자라는 아이들 뿐이다. 부모가 부유하다면 학원이나 학습지를 통해서 아이들을 지도할 수 있다. 부모 스스로의 지적 능력이 뛰어나다면 부모가 직접 아이들의 학습을 지도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쪽에도 해당하지 않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특출난 재능이나 노력이 있지 않은 한, 결코 학교 교육을 그대로 따라갈 수 없다. 특히 맞벌이와 양극화가 심화되는 현실에서 부모들은 하교하여 집에 있는 아이들을 적절히 통제하기 어렵다. 많은 초등학교 교사들은 지적한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들은 내용을 대부분 다음 날 (복습하지 않고) 잊어버린다. 아이들이 복습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가정으로부터의 지도가 필요하다.
상술한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지금까지는 학교에서 學만 담당했지만, 앞으로는 習의 과정도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절대 다수의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최선의 교육을 제공할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학교가 그 역할을 맡아야 한다. 선생이 앞에서 말하는 내용을 아이들이 스펀지처럼 빨아들인다는 사고는 잘못되었다. 사람은 훈련을 받아야 하며 강제적으로 주입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육의 효과는 크게 떨어질 수 밖에 없다. 모든 성공적인 교육은 암기와 반복을 통해서 완성된다.
③ 학교역할의 변화
상술하였듯 학교의 역할은 더욱 확대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확대는 물리적인 것을 포함한다. 요컨데 학교는 지금보다 더 오랜 시간 아이들을 붙잡아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교사의 역할도 변화가 필요하게 된다. 지금까지 교사들은 강의를 중심으로 하였다. 그러나 정보의 보존 및 전달이 용이해진 현대에 반드시 사람이 직접 강의를 할 이유는 없으며 그것이 효율적이지도 않다. 이를테면 TED등에서 강연하는 각 분야 전문가들이나 인터넷 강의를 진행하는 스타 강사들의 강의능력은 일반 교사나 학원 강사들이 따를 바가 아니다.
과거에는 시공간적 한계로 인해 소수의 전문가와 스타 강사를 여러 학생들이 소비하는것이 불가능했다. 실제로 90년대 말에서 2k년대 초까지는 대치동같은 교육선진지구(?)에 뛰어난 강사들이 모이고 몇몇 명문 학원이 그들만의 노하우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 들어 정보통신기술이 발전하면서 이런 독점 자체는 오래 전에 깨어졌다. 당시의 충격은 생각보다 엄청났다. 가장 유명한 인강 사이트인 메가스터디가 처음 등장했을 때, 지방 출신 학생들은 대치동에서 공유되던 학습 노하우와 비법들, 그리고 뛰어난 강의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기술의 발전이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그 결과 현재까지도 큰 비용 없이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런 고급 사교육 자체에는 어렵지 않게 접근이 가능하다.
일반 교사들이 과연 이런 스타 강사들이나 교수들의 강의력을 따라가도록 만들 수 있을까? 필자는 부정적이다. 사실 그래야 할 필요도 없다. 정말 공부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사실 저런 강의를 접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굳이 막대한 비용을 더 들여서 교사들을 공급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보다 교사들은 반드시 자신들과 직접 얼굴을 맞대야만 할 수 있는 것을 하도록 재교육되어야 한다. 인강이 제공할 수 없는 것을 제공하는 데서 가치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2) 인성교육 : 인간종의 분석을 중심으로
현행 교육체계에서는 아이들에게 인성교육을 행하고는 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참으로 아쉬운 수준이다. 즉, 약속의 중요성을 배우자거나, 가족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자거나, 예절을 갖추자거나 하는 식의 정언명제 학습형태를 띄고 있다. 이런 교육의 효과는 유감스럽게도 별로 좋지 않다. 이런 교육들은 생활에서 체화되는 것이지 강단 앞에서 선생님이 말한대로 배우거나 하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앞에서 선생이 (비도덕적인) 반대 명제를 던지고 아이에게 발표를 시켜보라 하면 아이는 일어나서 "그건 나쁜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앵무새처럼 말할 뿐이다. 당연히 이런 상호기만적인 연극적 교육을 통해 아이들의 인성이 나아진다는 증거는 없다.
반대편에서 이를 비판하는 전교조의 대안적 교육 주장도 한심하긴 마찬가지이다. 이미 전술한 바와 같이, 전교조 등에서는 인성교육을 강화하자면서 예술과 체육, 물론 도덕·사회 등의 비입시 교과의 비중을 높이자고 주장한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나아가 아침 독서 및 명상 시간을 운영하고, 방과후에는 부활동을 활성화시켜서 공동체 놀이 및 동아리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권장해야 한다고도 주장한다.이런 주장의 근간에는 인성교육이란,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거나, 시와 문학을 감상할 수 있거나, 혹은 체험학습 등을 나가서 산들바람 아래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에 있다는 일종의 전인교육론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이런 막연한 주장은 전교조식의 인성교육론이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이다.
이상의 교육론들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마음과 사고과정에 대한 이해가 없이 만들어졌다는 한계를 지닌다. 즉 선생은 도덕교육을 완료한 것처럼 질문하고, 아이들은 도덕적으로 변한 것처럼 대답한다. 이런 교육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그렇다면 인간의 사고과정은 어떻게 구성되어있으며, 교육자는 아이들의 관계를 어떻게 가르치고 통제할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우선 학계의 논의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① 협업 : 생물학적 산물
인성이란 인간에게 협업능력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리고 이 협업능력은 생물학적으로 생성된 것이다. 이를테면 햄스터로 예를 들어보자. 햄스터는 거주 밀도가 일정 이상으로 증가하면 서로 죽인다. 어미 햄스터가 자식을 죽이거나, 햄스터끼리 서로를 잡아먹는 등의 일은 햄스터의 당연한 특성이지, 그 햄스터가 정신병에 걸려서 벌이는 일이 아니다. 때문에 햄스터를 키울 때 비극을 막기 위해서는 그 습성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람은 이런 야만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그것은 사람이 수양을 잘 쌓아서가 아니라, 그것이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이기 때문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탈리아의 영장류행동학자인 지아코모 리졸라티는 침팬지를 연구하면서 거울뉴런이라는 가설적인 기관을 주장했다. 거울신경세포란 명칭은 그 이름 그대로 다른 동물의 행동을 "거울처럼 반영(mirror)" 한다는 특성을 의미한다. 이 거울뉴런이 있는 생물은 다른 생물을 관찰할 때 그것은 마치 관찰자 자신이 스스로 행동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 신경세포는 동종의 같은 생물끼리 표정이나 언행을 통해 그 감정상태를 인식하고 동일한 감정상태를 느끼게 하는, 요컨데 공감능력의 근원이 된다고도 추정된다. 본래 이 기관은 가설적으로만 주장되어왔으나(인간의 다른 장기와 달리 특정한 신경세포나 독립된 기관이 존재하는것이 아니라, 신경세포들의 네트워크로 존재한다 추정되기 떄문이다), 근래에는 실제 뇌의 특정 부분에 거울뉴런 네트워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실증적으로 입증되어있다.
처음에는 이 거울뉴런이 인간의 사회적 특성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되었다. 이를테면 라마찬드란은 거울뉴런이 인간의 언어습득에 관여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이 공감능력이 인간을 비롯한 생물들에게 집단생활을 가능케 해줌은 주지의 사실이다. 거울신경세포에서 드러나는 공감능력이나 마음이론은 고도화된 의사소통이 요구되는 집단생활 영장류에서만 발견되는 특유의 진화학적 산물이다. 인간이 집단생활을 하는 것은 종교나 과학의 산물이 아니라, 진화적 산물이다. 보노보와 같은 일부 종들도 인간과 같이 서로 만지면서 친교를 확인하고, 번식의 목적이 아니라 관계의 확인을 위해서 생식기를 맞댄다. 이들은 구성원 중 누군가가 죽었을 때, 다른 생물들이 그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것과는 달리 일종의 당혹스러움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인간이 일반적인 영장류보다 더욱 뛰어난 심리적 기제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 일반적이다. 바로 "마음이론(Theory of Mind)"의 등장이다. 이는 자신의 객관화를 가능하게 해준다. 즉 타인도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는 것이 존재함을 알게 하는 것이다. 마음이론은 대략적으로 만 5세 이전에 획득된다고 알려져있다. 이 나이 이전의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거짓말은 타인이 어떤 정보를 갖고 있는지 우선 파악하고 그것이 나의 정보와 어떻게 다르며, 그 차이를 나의 이익으로 전환시키는 매우 복잡한 인지적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고도화된 마음이론은 인간이 다른 영장류와 다른 길을 걷게 만든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뒤이어 찾아온 인지혁명으로 현생인류는 과거 어떤 생물들도 도달하지 못한 영역에 도달한 것이다.
② 두 가지 인지체계
이같은 진화과정을 통해 인류는 두 가지의 인지체계를 가지게 되었다. 바로 상위 인지와 하위 인지이다. 대니얼 골먼같은 심리학자는 물론이고 하워드 마골리스같은 공공정책행정학자조차 이미 80년대 이전부터 인간에게 이 두 가지 인지가 있음을 알고있었다. 이미 웨이슨은 4장의 카드 과제 카드 판단과 정당화는 별개의 영역임을 밝혀낸 바가 있다. 전자가 논리체계와 같은 연산을 수행한다면 후자는 (인간 이전 수 억년 간 다른 생물들이 그러했듯) 보다 본능적인 영역에서의 연산을 수행한다.
공감능력은 그 자체만으로는 후자의 연산에 속한다. 그러나 교육의 대부분은 상위인지의 영역에서 이루어질 뿐이다. 즉 도덕교육이 논리명제를 학습시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도덕교육의 가장 큰 결함이다. 본래 인간의 행위란 논리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감성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이전 시대에는 하위인지를 학습시키는 것은 고려하지 않고 교육 커리큘럼을 만들었으며, 때문에 대부분의 인성교육은 공허한 명제로만 남을 뿐 현실적으로 제한된 영향력만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들은 하위인지 역시 학습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해냈다. 폴 에크먼은 인간의 감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표정'을 연구하였다. 그는 얼굴에 있는 수 천개의 근육들을 모두 분석하고 이를 자신의 의지대로 조절하기 위한 연습을 시도했고, 각 근육의 변화를 통해 수많은 표정들을 만들어보았다. 에크먼은 사람들이 표정을 어떻게 읽고 해석하는지에 대해 연구를 진행한 것이다. 이에 따라 에크먼은 표정이 단순히 감정을 나타내는 역할 뿐 아니라, 타인과의 의사소통에 사용됨을 알아내었고(대표적으로 '사교용 웃음'이 있다), 진화학적으로 표정이 정보전달로서 매우 큰 역할을 해왔을 것임을 입증하였다.
에크먼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과연 이 의사소통 과정을 의도적으로 학습시키고 강화할 수 있는지를 실험하였다. 그는 표정을 만들어내는 단순한 프로그램을 만들고 이를 대상자들에게 학습시켰다. 에크먼은 이 연구를 통해서 놀라운 결과를 얻었다. 그다지 긴 학습시간을 소요하지 않고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의 감정을 읽는 능력을 급상승시킬 수 있었다. 해당 연구는 대부분은 상위 인지를 통해 진행되었으나, 그것에 그치지 않았다. 에크먼은 해당 프로그램을 수행한 결과 이성적인 판단능력만 상승하는게 아니라, 본능적인 부분도 발전하였음을 발견한 것이다. 해당 프로그램을 수료한 사람들은 타인의 표정으로부터 이변을 감정적으로 알아채는 능력이 더 높아졌고, 타인의 감정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이 사실에 고무된 몇몇 수사기관은 수사관에게 에크먼의 프로그램을 수료하도록 함으로 타인의 거짓말이나 감정변화를 기민하게 알아채는 능력을 학습시켰다.
이 연구는 우리 교육체계에 큰 메세지를 전한다. 도덕에 필요한 하위인지 역시 교육을 통해 충분히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장 에크먼의 실험만 적용하여도 공감능력의 개발은 충분히 가능해진다. 타인과의 의사소통이 강화될수록 갈등요소의 온건한 해결의 가능성 역시 커진다. 그러나 우리의 아이들은 아직도 강단에서 교과서에 나온 문장들과 행동원리를 읽혀주는 방식으로 아이들의 도덕성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 의해 교육받고 있다. 인간에 대한 매뉴얼도 없이, 공장에서 찍는 대로 아이들을 찍어낼 수 있다는 전제하에 진행되는 교육 말이다. 그들은 수업중에 자신이 할 말을 다 한 다음에, 아이들에게 발표를 시킨다. "자 ~에 대해서 OOO 발표해보세요." / "그건 나쁜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 "옳지 잘했어요." 이게 정말 아이들의 인성을 향상시킬 수 있단 말인가?
③ 정신장애의 구별
한편 협업능력이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생물학적 기관의 산물이라는 사실은 불편한 사실 또한 보여준다. 요컨데 '물리적으로' 해당 기관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 인간이 사회에 어울리는건 근성이나 노력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선천적이건 후천적이건 여러가지 이유로 공감능력이 낮거나 극히 떨어지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으며 그 중에는 분명 해결이 불가능한 사례가 존재할 것이다. 이런 정신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학교에 무작정 보내는 것은 (많은 부모들의 간절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결코 좋은 선택이 되기 어렵다. 이 아이들은 자신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서,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많은 상처를 입힐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교사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알겠냐고 이 아이들을 방치해왔다. 심지어는 클래스메이트 중 좀 만만한 아이를 붙잡아서 이런 아이들을 챙겨주라고 명령하고는 자신의 책임을 던져버리기도 했다. 물론 친구들이 착해서 잘 챙겨주면 좋은 일이나, 아이들은 결코 전문가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아이들은 이런 병에 걸린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지 모른다. 선의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키울 때 부모들은 아이에 대한 무한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는다. 그냥 아이도 아닌 장애아를, 주변의 아이들이 다만 선의로서 챙겨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분명한 잘못이다. 더군다나 선의조차 없다면 어찌할 것인가?
현 교육 하에서 초등학교 고학년 이후의 교사들은 자신이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분야만을 강의할 뿐, 아이들의 관계망에 대해서는 알기도 힘들고, 별로 알고싶어하지도 않는다. 이는 학교의 역할을 단순히 지식의 전달자로만 보고 강의에만 집중하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학교의 역할이 이렇게 제한되어있는 이상, 전문분야 외에는 큰 교육을 받은 바 없는 일반 교사들에게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제 우리 사회는 학교가 학업뿐 아니라, 아이들의 가치관 형성과 정체성의 고민에도 역할을 할 것을 요구한다. 특히 아이가 아직 어려 기초교육과정을 배우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더군다나, 근래의 몇몇 사태들은 더 이상 가정에만 아이들을 맡길 수는 없고, 부모들을 무작정 믿어서도 안됨을 시사하고 있다. 물론 절대다수의 부모님들은 근본적으로 아이가 잘 되길 원하지만, 그러나 상술했듯 선의에는 한계가 있다. 부모가 근본적으로 선의를 가졌다는 이유로 아이가 잘되지는 않는 것이다.
이제 학교는 아이들의 학업 외 영역도 담당해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아이들의 건강상태를 검사하는것이 포함될 것이며, 당연히 대인관계 역시 배제되지 않아야 한다. 특히 저학년 과정에서 학교는 아이들 중 특별히 관계형성에 문제를 겪거나, 더딘 아이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그 중에서는 물론 정신장애를 가진 아이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 과정은 전문적으로 진행되어야 하낟. 단순히 약간 더딘 수준과 장애 사이에는 분명한 간극이 있다. 정신병의 판정이란건 생각보다 더 엄격하고, 또한 고도화된 작업이다. 예를 들어 DSM(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과 같은 정신질환서의 기준서가 이에 해당한다. 해당 과정은 전문적인 의사에 의해서만 다루어져야 할 것이며, 때문에 정신장애의 판별 과정은 일반 교사가 아니라, 전문의나 심리학자, 상담사 등 전문 훈련을 받은 여러 사람들을 통해야 할 것이다.
3) 선택과 집중
현 우리의 교육과정은 전인교육의 사상에 맞추어 만들어져있다. 이 교육은 이른바 Liberal Arts의 전통을 한국에서 수용한 결과물이라 해야 할 것이다. 때문에 아이들은 국어 영어 수학과 같은 필수적이고 중요한 과목 외에도 교양용의 과목, 요컨데 도덕, 생물, 물리, 지리, 역사, 체육, 음악, 미술과 같은 다양한 과목을 가르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전인교육의 사상적 근거는 명확하지 않다. 전교조에서는 이런 전인교육이 곧 사람이 사람다운 본성을 회복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인지를 알기 어려운 주장에 불과하다. 굳이 전인교육이란 말을 선해한다면 널리 두루두루 교양을 지닌 사람을 만들자는 것이고,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그냥 '모든 분야에 부족하지 않은' 인간을 만들자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접근에는 문제가 있다. 인간은 모든 분야에 적성을 가질 수도 없고 사실 그럴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의 통계를 보면, 한국 출신 학생들의 창의력은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다르게) 세계에서 2위를 차지했으며, 나머지 1~7위도 모두 주입식 교육의 산실인 동아시아측 국가들이 차지하고 있다(이는 창의력은 결국 교육과 학습에 있음을 반증한다).
여기까지는 좋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이렇게 창의력이 뛰어난 한국의 아이들이 왜 대학교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그에 걸맞는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가? 한국의 노벨상 수상자도 한 명 뿐이고, 그나마 지력과는 별무관한 평화상에 불과하며, 다른 분야에서라도 한국인의 천재성(?)이 딱히 다른 나라에 비해 빛을 발하지는 못하는 것이 냉엄한 현실이다. 이 문제의 원인으로는 대학교 이후의 교육생산성을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고, 이른바 군대로 대표되는 저급한 권위주의적 문화도 분명히 영향을 줄 것이다. 혹자는 연구기관에 장기적이거나 충분한 투자가 부재한 상황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긴 논의 이전에, PISA의 통계는 그 자체만으로도 한국 학생들이 처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즉, 창의력에 관한 해당 통계가 항목별 평균치라는 것이다. 개별 과목에 따라 순위를 다시 매기면, 한국 학생들의 창의성 순위는 20위 밑으로 급락한다. 모든 분야를 교육하다보니 어떤 분야에서도 결정적인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흔히들 뇌의 가소성에 대해, 영국 런던 택시운전사들의 두뇌에서 해마가 커졌다는 사례는 매우 유명하다. 그러나 사실 이 실험에는 후속연구가 존재한다. 해당 실험을 주도한 맥과이어는 택시 운전사 및 그 지망생들로 이루어진 실험 참가자들을 상대로 복잡한 도형을 기억하는 공간기억 표준검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택시 운전사들은 일반인이나 단순 지망생보다 훨씬 낮은 점수를 기록했다. 이 후속 실험의 합의는 명백하다. 어떤 분야에 대해 보다 전문적인 학습을 한다면 시간과 학습비 뿐 아니라, 다른 분야의 능력을 대가로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복잡한 현대사회를 시민으로서 살려면 원하든 원치않든 여러 종류의 지식을 가지긴 해야할 것이다. 당장 아무리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세금도 낼 줄 모르고 집안 정리조차 할 줄 모른다면 무능력자 소리를 들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천재적인 과학자들 중에는 원래 이런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일화로 아인슈타인은 물리학 뿐 아니라 바이올린 연주도 잘 했지만, 그러나 세금 계산은 하지 못하겠다고 회계법인에 영수증들을 모아서 들고 갔다. 아인슈타인이 무능했다거나 괴짜라서 못한 것이 아니다. 만약 아인슈타인이 세무를 교육받고 배우려고 했다면 충분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신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연구에 지장을 받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예는 과장된 것이라도 쳐도, 분명한 것은 최소한의 사회필수적인 지식들을 제외한 나머지 지식들은 익힐 수 있는 환경(도서관 등)을 확충하여 필요할 때 배우도록 할 일이지, 학교에서 일률적으로 모든 학생들에게 강의하고 시험쳐서 평가할 일은 아니다. 더군다나 전인교육이라는건 사회생활을 잘 해나감을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말 그대로 '교양있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 만들어졌다. 결과적으로 우리 아이들은 시민으로서 이 사회를 살아가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앞으로도 별 쓸모가 없을 과목들을 배우는 것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다 자라면 소설을 읽거나 시집에서 시어를 해석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조금만 크면 옛 도덕이나 철학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고, 사실 가질 이유도 없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관동별곡과 같은 고전을 읽을 일이 없고, 이를 해석하는게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고등학교만 지나가도 리코더를 불 일이 없고 오카리나를 만질 일이 없으며, 다른 악보를 보거나 읽고 해석할 일도 없다. 도대체 이 과목들이 아이들의 미래에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우리 아이들에게는 가르쳐야 할 것이 많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불필요한 커리큘럼의 비중은 크게 낮추어서라도 다른 수업 시수를 확보해야 마땅하다. 상술한 과목들은 통폐합하여서 "일반교양"이라는 이름으로 상식적인 내용만 가르치면 그로서 족하다. 소설에 뭐가 있다느니 시는 어떻게 해석해야한다느니 이런 것들은 대충 그런게 있구나 하고 넘어가면 될 일이고, 리코더는 운지법이나 익히고 삼십분 정도만 간단한 곡을 연주해보라 하는 거으로 충분하며 피아노도 대충 무슨 건반이 무슨 음이구나 정도만 알면 된다. 그 이상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이를 두고 음악이나 미술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알려줘야 할 필요성을 주장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취미'조차도 어떤 도덕률에 입각해서 가르치려고 하는 것 같다. 취미는 개인이 알아서 가지는 것이지 누군가 교육해서 강제로 가지게 하는 것이 아니며, 그래야 할 이유도 없다. 취미를 권하거나 추천하거나 소개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수용할 지는 말 그대로 취향의 영역으로 놔두어야지 시험과 평가의 영역으로 끌어들일 것이 아니다.
4) 학습법의 교육
① 필요성
대부분의 국가 주도 시험들에서는 다른 요소 없이 시험만으로 평가를 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각급 공무원 시험이나 구 사법시험 등이 그러하다. 때문에 하위권 대학을 나왔다고 하여 공무원 시험에서 불리한 점은 없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실제로 관련 시험들의 통계를 내보면 평균적으로 명문대 학생들이 유의미하게 합격률이 높은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유는 분명하다. 이들은 공부를 하는 법을 이미 체화한 바가 있다는 것이다.
공부를 위해서는 효율적인 자기관리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자기관리에는 물론 근성이나 끈기,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 만큼이나 기술적인 요소도 중요하다. 자신이 하루에 몇 시간 공부하는 게 적당한지, 어떤 환경에서 집중을 잘하는지, 암기는 어떤식으로 해야하는지, 공부에 방해되는 요소로는 무엇이 있었는지 등에 대해서 이미 자신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 월등한 수학능력을 가졌을 수 밖에 없다. 고교시절 이같은 공부를 안 해 본 사람은 시행착오만으로도 수 개월 이상을 허비하는 일이 잦고, 그렇게 허비해놓고도 자신의 공부스타일을 확립하지 못하기까지 한다. 설령 자신의 공부스타일을 터득하였다 하여도 이를 습관화하여 체득하는 시간이 또한 별도로 필요하다. 하다못해 책상에 오래 앉아있는 습관을 들이는 것도 시간을 요한다.
상위권 대학에 진학한 학생들은 수시 전형이건 정시 전형이건, 내신관리를 잘 했건 수능 성적이 좋았건, 대부분 고등학교 이전에 그같은 공부 스타일을 확립한 학생들이다. 그리고 이처럼 공부 방법을 아는 것은 굉장히 큰 차이를 가져온다. 10시간을 똑같이 투자해도 본인에게 맞고 습관화가 이미 되어있는 공부법과 그렇지 않은 공부법은 그 효율성의 차이가 극도로 나뉜다. 대부분의 경우 학생들의 성과에 차이가 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근본적으로 모든 인간에게는 수학 능력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수학 능력은 개발하지 않으면 결코 개화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교육현장은 어떠한가? 하다못해 학교에서 노트정리법이나 암기법, 기타 공부방법에 대해서라도 충분한 교육을 받은 적이 있는가? 절대 다수는 없을 것이다. 필자의 경험으론 기껏해야 선생이 노트 정리 잘 한 아이의 노트를 들어서 "봐라 OOO 얘는 얼마나 깔끔하게 노트를 잘 정리했냐. 니들도 한번 이렇게 해봐라" 라고 한게 고작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그렇게 정리 하던가?
② 구조변화의 필요성
물론 이는 선생들 탓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우리 공교육 시스템 자체가 그렇게 짜여있었으니까. 여태까지 학교는 아이들 앞에서 강의만 하면, 아이들은 알아서 그걸 뇌에 쑤셔박을거라고 전제하고 교육을 진행해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듯, 강단 앞에서 선생이 말하는 것들은 순식간에 절반이,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7-80% 이상이 기억에서 사라진다. 아이들이 지식을 머리에 넣는 것은 앞에서 선생이 강연을 할 때가 아니다. 그 뒤 직접 다시 정리하고 문제를 풀며 스스로 연습할 때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교육에서는 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시간에 대해서 다만 "예습/복습을 철저히 하도록"이라는 한마디 외에는 아무런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현실이었다.
교육의 목적은 사람을 더 좋게 변화시키는데 있다. 당연히 선생은 아이를 실제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그 선생은 교육을 하지 않은거고, 교육을 하지 않은 선생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과 같다. 강단 앞에서 몇 시간을 떠들었건, 아이들이 그로서 배운 것이 없다면 선생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과 같게 취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선생들은 자신은 열심히 한다고 항변할 지 모르겠지만, 열심히 했다는 이유만으로 직업을 보장받는 곳은 없으며 그래서도 안된다. 교육은 성과를 내야만 한다.
이제 뇌과학자, 심리학자들은 전통적인 방법의 공부가 얼마나 비효율적인지를 지적한다. 마크 티글러나 안데르스 에릭슨 같은 학자들은 새로운 교육 시스템을 제안한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새로운 학습법의 효과가 훨씬 놀라웠음을 공통적으로 지적한다. 서점 등에서는 그런 연구 성과가 이미 책으로 발매되어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학습법에 관한 책을 잠깐 보는 사람들은 많지만, 이를 체화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는다. 누구도 그렇게 이끌어주지를 않으니까. 근성있는 일부는 스스로에게 동기를 부여하면서 새로운 학습법을 몸에 익혀나갈지 모르지만, 대부분은 그렇게 하지 못하며 사실 그게 당연하다.
이제는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마땅하다. 늦어도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아이들은 "학습법"을 익혀야 한다. 아이들은 어떻게 공부를 해야 동시간 내에 효율적으로 다량의 지식을 머리에 집어넣을 수 있는지를 익혀야 한다. 또한 아이들은 어떻게 공부를 해야 훨씬 빠르게 자신이 배운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지를 배워야 마땅하다. 이 과정은 학생들 스스로에게 방치되어서는 안된다. 그렇기에 이 지점에서 학교와 선생이 나서야 한다. 학습효율을 최대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학교측에서도 교수방법을 더욱 개발해야 한다.
지금 학교는 그런 방향으로 설계되어있지 않다. 도대체 지금 학교에서 말하는 교권이 대체 무엇인가? 애들을 패서 교실에 밀어넣고 교사가 앞에서 강의할 동안 가만히 앉아있게 강제할 권한이다. 이런 미개한 개념을 언론에서는 교권추락이니 뭐니 하면서 옹호하고 있는게 현실인 것이다. 학교는 아이들을 모아서 수용하기 위해 있는게 아니라 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있다. 학교는 결과를 내야 하며 그 결과를 위해서 아이들이 학교에 다닌다. 결과를 내지 못할거면 아이들은 학교에 가선 안된다. 학교가 결과를 내지 못한다면 학교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
학교는 어떻게 교육생산성을 재고할 것인지, 그리고 아이들에겐 어떻게 피드백을 해야하는지, 그리고 그런 피드백이 얼마나 효과있는지에 대해서 연구를 진행해야 한다. 또한 아이들 입장에서도 어떻게 학습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다음 장에서 언급을 시작할 것이다. 이후 중등교육과정에 이르면 아이들은 많은 양의 지식을 머리에 박고 뇌를 재편성해야한다. 때문에 초등교육 과정이 끝나기 전에 아이들은 학습 전 준비를 완료해야만 한다.